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3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노태우가 이겼을 것이다 === 국민들이 장기간 지속된 권위주의 통치에 반감을 가지곤 있었지만, 당시 순항하던 세계 경제 정세와 맞물려 3저 호황 시대를 이뤄낸[* 박정희 집권기는 일약 중진국으로의 진입이라는 눈부신 경제성장, 생활수준 향상을 경험하면서도 막대한 돈을 찍어내 경제개발에 투입하는 개발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두자릿수 물가상승이 지속된 반면, 전두환 집권기는 강력한 물가통제로 1982년부터 물가상승률이 한자릿수로 내려가며 집권 말기인 1986년에는 일명 3저 시대를 맞게 된다. 유가는 이란-이라크 전쟁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미국발.] 당시 집권여당의 국정운영에 대해 어느정도 만족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훗날 전두환은 당시 본인이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 경제 문제는 죄다 전문가들에게 맡겼다면서 미담처럼 회고하기도 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전문가들을 참모로 등용하여 확실한 믿음을 주고 그 분야를 일임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노태우 후보가 호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으면서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물론 경제가 좋은데도 이토록 고전했다는 측면에서는 한편으론 오히려 당시 정권이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방증하는 요소일수도 있지만..[* 사실 정권을 지지하는 요소엔 경제 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교육, 복지, 외교 등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따지면 일부 분야 빼곤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항목이 더 많았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볼 수도 있다. 당장 이 정권에서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만 봐도..][* 경제발전의 과실을 가장 못 본게 강원도와 TK 북부, 광양제철, 여수공단 등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 호남지역이었다. 호남은 특히 목포, 군산 등 항구 도시들의 경우 박정희 정권기에 비해 전혀 성장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1980년대 수도권 이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2146299|#]] ] [[부울경|PK]] 유권자들은 군정독식에 대한 열망이 강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부가 정부부처 인사들을 임명할 때도 TK를 챙기면서도 한편으론 PK 출신 인사들 또한 배려해준 측면이 있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김기춘]]이 있다. 박정희 정부에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맡는 등 일찌감치 [[공안]]통으로 활약한 김기춘은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도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래서 호남만큼 노태우에 대한 반감이 크진 않았고, 반대로 호남 출신인데다 북한 간첩이라는 의심까지 받던 김대중에 대한 거부감 또한 꽤 있었다.[* 물론 지역마다 차이는 좀 있었다. 또 일자리를 찾아 부울경에 온 호남권 유권자들도 있었기에 김영삼한테 몰린 것일뿐 마냥 김대중 지지세가 제로에 수렴했다고 보긴 어려웠다. 당장 7대 대선에선 부산 지역에서만 40%대 득표율을 올린게 김대중이였다. 평민당과 김대중의 구상대로 김대중으로 단일화되어 김영삼의 승복선언후 김대중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면 13대 대선과 같이 처참한 패배는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만약에 당시 [[평민당]]과 [[김대중]]의 구상대로 노태우 vs 김대중 구도가 되었다면, 실제 선거에서 노태우의 득표율이 36%, 김영삼의 득표율이 28%, 김대중의 득표율이 27%였으므로, 결국 김영삼 표 중 60%가 노태우로 갈 것이 될테고 전국 득표에서 노태우 55%, 김대중 35%가 나와 노태우가 20%P로 압승했을 것이라는 주장. 다만 상기했듯 과연 [[평민당]]의 구상대로 4자필승론만으로 서울수도권에서 [[노태우]]를 이긴다면 판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고, 반대로 김영삼으로 단일화 후보가 되었을 경우엔 호남 입장에선 노태우나 김영삼이나 둘 다 영남 출신이라 그럴바엔 차라리 군정이라도 종식시키고 5.18의 한을 풀자는 쪽으로 표가 몰렸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알기에 당시 중진들도 김영삼 단일화를 먼저 제안한 것이고.. 결국 당시 노태우가 두 후보의 표를 지지 기반이 붕괴할 정도로 스틸할 수 있다는 식의 4자 필승론식 낙관적 가정보단 차라리 노태우가 김종필을 꼬드겨 단일화하고 양김의 표를 조금이라도 획득했을 경우를 상정해보는게 더 현실성은 있을 것이다. 실제 이 경우는 6% 내외의 표만 양김에서 빼오면 되는지라 정권 차원의 공작은 둘째치고 지역 감정을 잘만 이용하면 어느정도 현실성은 있었다. 물론 5공에 탄압받던 김종필이 순순히 단일화에 응해줬을지는 변수겠지만 어차피 모든게 지금 와선 추론의 영역일 뿐이긴 하다.단일화 거론 당시엔 반대로 3김 단일화 주장도 있었다. [[김종인]]에 의하면 그가 [[민주정의당]] 산하의 '사회개발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에 자체 직선제 여론조사를 했는 데, 김영삼 또는 김대중 어느 누가 노태우 상대로 단일화 후보로 나오더라도 노태우가 이긴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노태우 vs 김영삼의 경우 노태우가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노태우 vs 김대중의 경우 상당한 차이로 노태우가 이기는 결과가 나왔다고. 물론 노태우 vs 김영삼 vs 김대중 3파전이 되면 더욱 큰 차이로 노태우가 이기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노태우의 승리가 분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사정권에 대한 [[6월 민주항쟁|반발이 크던 시기]]인데 과연 김영삼의 표가 노태우에게 절반 이상 갔을지가 의문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당시 서울에서 [[김대중]]은 32.8%를 득표하여 1위를 거뒀으나 서울에서 30%를 획득하며 2위를 거둔 노태우와 2.8%p차로 겨우 신승했고 [[경기도]]와 [[인천]]에서도 [[김대중]]은 겨우 21~22%를 득표하여 39~40%를 득표하여 1위를 거둔 [[노태우]]의 절반남짓 득표하는데 그쳤는데 과연 노태우와의 1대1 구도에서 서울 경기 수도권의 표가 얼마나 김대중에게 갔을지 의문을 사는 대목이다. 당장 불과 2년 전에 치러진 [[12대 총선]]에서 안기부는 민주정의당의 무난한 승리를 전망했지만 현실은 신한민주당의 돌풍으로 나타났고 이에 격노한 전두환이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을 질책하기도 했다. 이 시대 여론조사의 신뢰성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는 것. 즉 이는 김종인이 확인한 여론조사가 현실과는 달랐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